조선시대 일본과의 교류는 영남대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양산에는 조선통신사 사행이 지 나가는 길이 두 군데 있었다. 양산의 서부지역인 황산베랑길, 동부 양산인 웅상지역의 용당을 거쳐가는 길이 있었다. 이렇게 두 갈래 길로 통신사들이 오르내리는 길이 있는 지역은 전국적으로도 드문 경우다.
 사행로가 양산을 지나갔다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지난 2월 1일에 양산시청에서 공무원 대상 직원 소양 특강이 있었는데, 강사는 고려대학교 학장, 행정대학원장 역임한 이명훈 교수였다. 제목은 `역사와 경제 : 양산 스토리텔링의 부가가치`였다.
 이명훈 교수는 울산의 `이예로`를 에로 들며 웅상지역의 7번국도 우회로를 `통신사로`로 명명하자고 제안하였다. 별 특징이 없는 도로명 보다는 역사적인 유래와 지역 특성을 살린 도로명 부여는 전국적인 대세라 할 수 있다. 타 지역의 좋은 선례는 빨리 벤치마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예는 조선초의 무인, 외교관으로 활약하였는데, 학성 이씨의 시조이며, 시호는 충숙이다. 아전생활을 하며 벼슬길을 시작하여 정2품에 해당하는 동지중추원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37년 1월 31일 3천 명의 왜구들이 울주포에 침입하여 군수 이은 등을 포로로 잡아갔다. 다른 관리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모두 도망갔는데, 이예는 자진해 군수를 따라가 끝까지 군수를 보필하여 왜적을 감복시켰다.
 후일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의 중재로 이예는 군수와 함께 무사히 귀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예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아전의 역을 면제하고 벼슬을 내렸다. 중인계급을 탈피하는 파격적인 승진을 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예는 아전 신분에서 벗어나 사대부 양반으로서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406년 일본 회례관으로 파견되어 납치되었던 남녀 70여 명을 데려왔다. 1416년에는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유구국(현재 일본 오끼나와)에 팔려간 백성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구국에 파견되어 44명을 데려왔다. 1418년에는 일본 대마도의 종정무가 사망하자 조의사절로 대마도에 파견되어 그의 충성을 후사하였다. 
 1443년 왜적이 남쪽에 침범하여 사람과 물건을 약탈하여 갔는데,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찾아오려 했으나 아무도 응하지 않자 자청해서 사신으로 가서 임무를 완수하였다. 44년간 일본에 40여 회 사신으로 다녀오며 데려온 포로의 숫자는 667명으로 기록되었다. 흉포한 왜적을 상대로 가련한 백성을 구해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외교관 역할을 한 이예는 대단 인물이다.
 일본과의 교역 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 체결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세종의 명으로 일본에 대장경을 전했으며, 일본에서 자전 물레방아를 도입하였다. 일본식 상가 제도의 도입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에 힘썼으며, 민간에 의한 광물 채취의 자유화 추진, 이에 대한 과세 제도의 정비, 화통 및 완구의 재료를 동철에서 무쇠로 변경을 건의하고 외국 조선기술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외교관의 기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백성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각종 정책을 건의하여 실용적인 외교관으로 활약하였다. 2005년 2월에는 문화관광부가 이 달의 인물로 선정하였다. 2010년에는 외교통상부가 올해의 외교 인물로 선정하였다. 울산광역시에서 이예로를 만든 것은 매우 잘 한 일이다. 
 반대로 양산이 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는 주요 통로로서 역사성은 인정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양산 고을에서는 수백여 명의 사신 수행원들이 먹고 마시고, 숙박하며 이동하는 모든 뒷받침을 해야만 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양산 고을의 백성들에게는 크나큰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대(支待)는 공적인 일로 지방에 나간 고관의 먹을 것과 쓸 물건을 그 지방관아에서 바라지하는 일을 이르던 말이다.
 일본으로 향하는 통신사는 통과하는 노정지역에서는 사행에 대한 접대인 `지대`와 필요한 인원 및 물자의 제공이 가장 중요한 일이자 부담이었다. 이는 1763년 통신사행의 정사 조엄이 "세 사신이 부산에 머물 때 일행의 지공(支供)을 으레 영남의 71개 고을에서 돌려가며 나누어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수백 리 밖에서 실어 나르는 폐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40~50일 동안 공급되는 물자의 소비가 얼마이겠는가?" 라며 그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조엄은 176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올 때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서 국내에서 최초로 동래와 제주도에서 재배하도록 보급하여 백성들의 식량난을 덜어준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현재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출신으로 대사헌, 이조판서, 제학, 경상도 관찰사, 암행어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창원, 진주, 밀양에 조창을 증설할 것을 건의하여 세곡 수송의 민폐를 근절하고, 공물 수납을 공정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여기서 지공은 음식 따위를 제공하며 사신 일행을 받드는 것을 말한다. 대일사행 노정의 포함 여부와 상관없이 양산은 도일을 앞둔 최종점검지인 부산과 가까운 도시였기에 어김없이 `지대`에 동원되었다.
 양산의 7번 국도 우회로가 완성되기 전에 도로명 주소를 통신사로라고 명명하는 것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하면 대일 사절이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갔던 양산의 웅상지역 용당, 황산역이 있던 물금은 새삼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도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조선통신사로를 따라 걸으며 한일 우호 친선을 다지고 있다. 이 귀중한 역사적인 사례를 두로명 주소로 남겨서 역사를 배우고 대비할 수 있도록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가르칠 필요도 있다. 양산은 신라시대 만고충신인 박제상 공의 탄생지로 대일 사행들은 반드시 효충사에 들러 박제상 공을 추모하고, 일본으로 가는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황산역, 용당역, 효충사를 연결하여 유적지를 발굴하고 관광자원화 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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