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검(刀劍)은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신표로
`칠지도`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준 하사품.

[이 칼은 모든 병해를 물리칠 수 있으니 후왕에게 나누어 마땅하다]

사진: 칠지도(七支刀) 명문(名文) 세부

 1870년대 이 칼이 처음 발견됐을 때 칼에 새겨진 60여 글자에 대한 해석에서 여러 설이 나와 논쟁거리가 됐다. 제작연대와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인가 하사한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제작연대 369년(백제 근초고왕 24)으로 밝혀진 이 칼의 내용은 `태화, 4년 5월 16일에 100번을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것. 
 칠지도의 형상은 단군신화에 보이는 신단수와 같이 신앙의 대상을 도형화한 것인데  하늘과 연결되는 천손을 자처한 백제왕의 권위를 과시하는 주술적 성격의 성구(聖具)였다. 칠지도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들이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도 출토됐다.

[칠지도] 형상은 단군신화의 신단수와 같은 신앙대상을 도형화하였다. 백제 근초왕이 왜왕(천황) 지(旨)에게 하사한 철제(鐵製) 칼이다. 제작연대는 369년으로 알려진 이 칼의 길이는 74.9㎝. 단철로 만든 양날과 칼의 좌우로 난 가지칼날이 3개씩 뻗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칠지도]라 했다. 칼의 앞과 뒤 60여 글자로 된 명문이 새겨졌고, 그 외곽을 가는 금선으로 둘렀다.

 `이 칼은 모든 병해를 물리칠 수 있으니 후왕에게 나누어 마땅하다`는 내용과 제작자 이름까지 새겨진 명문해석이 나왔다. 백제 성상(聖上)의 말씀으로 신하의 나라인 왜왕을 위하여 만든 것이니, 백제와의 우위를 증명하는 뜻을 후세에 전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백제왕의 말을 극존칭 성상의 말씀으로 표현하고, 하사대상인 상대방 왜왕에게는 경어를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들은 백제왕자가 일본에 와서 이 칼을 조공식의 헌상을 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일본이 신라와 가야를 비롯한 7개국의 일부 영역을 백제에게 주었으므로, 백제왕이 영원한 복속을 맹세하며 `칠지도`를 바쳤다고 한다. 정작 칠지도에는 백제의 왕세자가 일본에서 얹혀살면서 칠지도를 헌상했다니 모두 앞뒤가 맞지 않다. 칼이란 원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사하는 것이지, 아랫사람이 존경의 뜻으로 윗사람에게 바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옛부터 도검(刀劍)은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신표로, 백제왕의 칠지도는 왜왕에게 주는 하사품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명령형의 하행문서로 이 칼을 백제와의 우정을 위해 왜왕에게 주는 것이니, 그 뜻을 후세에 이르도록 전하라 한 것인데 일본학자들은 여기서도 자의적 해석으로 일관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이어 고대 일본이 가야지역을 200년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로 이용했던 것이다. 
 백제 전성기 근초고왕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중국의 남조, 동진과 외교를 수립하여 무역을 전개하고 일본 큐슈에 진출하여 일본에도 세력을 뻗쳤다. 이때 근초고왕은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하며 당시 백제의 힘을 과시하였다. 근초고왕은 금관가야와 외교활동을 전개하여 세력을 넓혔고, 아직기를 통해 한자를 통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미 오래전 청동기부터 일본지역에 삼국문화가 진출하여 일본의 정치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 삼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 세 나라는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아 각각의 특성대로 그 문화를 수용하고 발전시켰다. 그 중에서도 백제 사람들의 활동이 가장 컸고, 삼국 가운데서도 백제가 일본과 가장 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친선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했다.

일본 나라 현 이소노가미 신궁에 봉안되어 있는 칠지도

 백제 근초고왕 때 아직기와 왕인이 일본에 건너가 한문을 가르쳤다. 이 때의 한문은 일본인에게 문화와 유교의 충효 사상도 보급했다. 근구수왕 때는 일본의 요청으로 백제 학자들이 초빙되어 학문과 도기, 직조, 도화 등의 기술을 전해 주었다.
 무령왕 때 오경박사 단양이와 고안무를 전했고, 성왕 때는 오경박사와 의술과 역술의 박사 등을 파견하여 일본인들에게 유학과 기술을, 그리고 성왕 때는 노리사치계가 불교를 전했다. 무왕 때 관륵이 역법과 천문학을 전하고 일본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일본은 백제문화로 일본 고대문화인 아스카 문화의 원동력이 됐고 백제문화권의 5층탑이 세워져 백제가람이라는 건축양식까지 생겼다.

사진: 안라신사를 모시고 있는 시가현 쿠사츠시 아나무라정 사람들과 사이타마현 히가시마쓰야마 시의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이 가야의 후손임을 말하고 있다. 일본인과 일본문화의 기원에 관한 학제적 연구를 한 오모토 게이치 도쿄대 명예교수는 2002년 DNA 분석결과 한반도 도래인들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일본인 전체의 80%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대가야나 금관가야, 아라가야, 백제인을 자신의 선조로 믿는 한반도의 후손들 중에 일본열도 서쪽 사람들 10% 이상은 삼국시대 도래인들의 후손일 것이란 추정이다.

 백제 사람들이 일본의 아스카 지방에 이주하여 아스카라는 절을 세우고 아스카 문화를 발전시켰다. 아스카시대를 연 핵심 인물은 백제계 이주민의 외손인 쇼토쿠 태자였다. 쇼토쿠 태자는 백제계 이주민의 협력을 얻어 백제의 기술자와 스님을 모셔일본 불교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서 학자와 책을 백제에 요청하여 학자 왕인박사가 왕의 손자인 진손왕과 함께 논어10권과 천자문을 가져가서 일본의 문화를 깨우쳐 주었다. 
 지금도 오사카지방에는 왕인 공원이 있고, 왕인의 묘로 알려진 유적과 도쿄의 공원에는 왕인을 추모하는 비석이 2개 있다. 저들은 해마다 왕인박사 유적지에서 한문과 유학을 알게 한 그를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구려는 백제만큼 빈번하진 않았으나 승려들에 의해 많은 문화를 전하였다. 610 년 영양왕 때 일본에 건너간 혜자는 일본 쇼토구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담징은 유교의 5경과 그림을 가르쳤고,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까지 전해 주었다. 일본의 `호류사 금당 벽화`는 담징의 그림으로 전해져오고, 영류왕 때는 혜관과 도징이 삼론종을 전하였다. 이처럼 삼국시대는 직접 일본에 가서 문화를 전하여 일본 고대국가 성립과 고대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다.
 담징은 승려 법정과 함께 공예, 종이, 칠, 맷돌 등의 제조법을 가르쳤다. 중국 운강석불, 경주 석굴암과 함께 동양 3대 미술품의 하나로 알려진 담징의 호류사 금당 벽화가 있다. 이 벽화는 1949년에 화재로 손실됐고 지금은 벽화는 그 모사품이라는 것. 신라에서도 조선술, 저수지 쌓는 기술을 일본에 전했고 도자기 만드는 기술과 의약, 불상 등을 전했다. 이처럼 삼국에서 일본의 초기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한반도에 대한 저들의 열망이 한류열풍의 근원이된 `구라다나이`. 
 오사카 [사천왕사 왔소]축제, 시모노세키의 여름축제 [바칸 마츠리], 대마도의 [아리랑 축제], 후쿠오카의 [아시아태평양 페스티발]에도 조선통신사 관련행사. 한반도 문물전래과정 매년 축제로 오늘날 일본에서 `제일이다, 최고다, 우수하다, 멋지다, 진짜다`라고 표현할 때 쓰는 말 중에 `구라다나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백제는 없다`는 강한 부정의 뜻이지만 이 말의 의미는 `백제 물건이면 무엇이건 다 최고다. 백제 물건이 아니면 필요 없다.`는 식의 음어(隱語)가 `구라다나이`이다. 
 `일본`이라는 국명과 `일본서기` 등 일본의 모든 것은 663년 신라에 패한 백제 유민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완성시켰다. 663년 백제가 신라에 패하기 이전 일본열도는 역사의 여명기였다. 백제의 속국으로써 왕인 박사를 비롯한 수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을 문명화시킨 것이다. 고대일본의 문화는 백제의 절대적인 영향권에 있었던 것이다. 수세기에 걸친 한반도에 대한 저들의 열망이 한류열풍을 낳았고 그에 수식어가 바로 `구라다나이`이가 된 것이다.
 일본 오사카에서 매년 열리는 행사에 `사천왕사 왔소`라는 축제는 조선통신사를 비롯한 한반도의 문물 전래과정을 축제로 조선통신사열풍을 대변하는 것이다. 시모노세키의 여름축제 `바칸 마츠리`, 대마도의 `아리랑 축제`, 후쿠오카의 `아시아태평양 페스티발`에서도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행사가 들어있다. 
 1607년부터 시작하여 1624년까지의 3차례에 걸친 초기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이 강제로 압송해 간 우리 백성들을 송환하기 위한 쇄환사였다. 1636년부터 1811년까지의 조선통신사는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 정권이 요청한 것으로 무려 아홉 번이나 됐다. 막부는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선통신사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막부의 환대는 부산을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됐다. 조선통신사 행렬도에는 호위선 140여척, 선박을 안내하는 예인선 230여척 등 무려 1천여척이 마중을 나왔다. 오사카에 닿으면 왜왕의 전용선인 천어좌선이란 호화선이 육지까지 인도했고, 각 번주들은 예복차림으로 통신사 일행을 맞이했다. 통신사 행렬을 본 영국 상인은 그 행렬이 마치 왕의 행렬 같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통신사가 올 때마다 천명이 묵을 수 있는 숙소까지 새로 신축하자니, 각 번주에서 통신사에게 베푸는 향응접대비가 막부 한해 예산과 맞먹었다한다. 통신사 일행은 사백여명이지만, 일본 측 고위관리는 팔백여명, 말이 팔백여필 등 3천에 이르러 에도(도쿄)시민들의 환영인파에 발 드릴 곳이 없었다고 한다. 
 도자기 열풍이 일어났을 때는 도자기 약탈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자 한반도 도공들을 납치하기 위한 도자기전쟁을 일으켰고, 일본이 오늘날 도자기 강국이 된 것도  임진왜란 때 잡혀간 수많은 조선도공들 때문에 가능했다. 이 무렵 일본은 수십만의 우리 양민들의 코와 베어가 교토에 있는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당 앞에 코무덤을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처음엔 귀를 잘랐으나 인체에 귀는 둘이고 코는 하나라는 것 때문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코를 요구한 것이다. 
 신라에 패망한 백제인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왜(倭)로 불리던 국호를 670년 오늘날의 국호 [일본]으로 바꾸고,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자 762년,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군사를 대대적으로 조련하여 통일신라를 정복하기 위해 발해에 협공을 요청하기도 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합병하려고 과거 한반도 남부가 일본 땅이니, 다시 찾아야 한다는 논리로 국민을 선동하고 이것을 침략전쟁의 구실로 삼는데 날조된 광개토대왕 비문을 이용한 임나본부설이다.  
 역사는 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드는 것이 역사라고 했다. 인간이 만든 역사란 물증인 유적이 그것을 증명한다. 신라왕족 무덤에서 고구려유물이 출토되고 신라 덕흥리 고분과 순흥고분에서 고구려벽화가 나왔는가 하면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도 고구려 유적이 나타났다. 
 영남대학박물관에 있는 고구려 지도에는 영주, 예안, 청송, 영덕 포항일부까지 고구려 영토였다. 신라를 지키기 위해 광개토대왕 군사 5만이 왔고, 일부 주둔군이 경주뿐만이 아닌 반경에까지 주둔한 것으로 울주군 은현리에서도 고구려 유적인 돌무지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 아래쪽에 기단을 쌓는 방식의 고구려적석총이 영남 남부까지 나타나는데 양산 어곡리와 천전리 암각에서까지 나타났다.      
 고구려 사람들은 돌을 이용하여 방 모양으로 만든 무덤들인데 일본에도 이런 돌방무덤들이 있다. 일본 다카마쓰 고분의 벽화에는 치마저고리를 차림의 여인과 청룡백호가 그려져 있는데 이런 것들은 고구려 귀족의 무덤과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일본의 `고마촌`(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에는 `고마신사`가 있어 고구려의 조상들을 모시고 있다. 
 일본열도 곳곳에는 대가야의 유물뿐 아니라 온돌, 점토로 만든 건물, 돌로 쌓은 무덤 등 대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후손들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삼국의 음악도 전해져 고구려악ㆍ백제악ㆍ신라악 등의 이름까지 생겨났으며, 드디어 일본 음악의 주류를 이루었다. 가고시마의 옥산신궁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도공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단군바위를 모셔 세운 신사이다. 이들은 조선의 후예로서 고국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담아 제문과 축가도 우리말을 사용하고 있다. 
 제문의 주요 내용은 "대한(大韓)의 혼이여! 밝혀 보소서. 무엇 때문에 우리가 떠돌이 원객(遠客)이 되었나이까. 일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사랑하고 도와주시옵소서. 무궁한 행복을 비나이다. 슬픔을 잊고 다 같이 힘을 모아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며 누에를 치고 고기를 잡게 길이길이 우리 모두를 수호하여 주시옵소서. 우는 새도 즐겁고 산에는 샘물 솟고 꽃이 피도록 우리 모두를 수호하소서."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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