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월포동 앞바다에 돼지처럼 생긴 돝섬이 하나 있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마산의 월영대에 살 때 괴수돼지를 쫓아냈더니 섬이 이런 모양으로 변한 뒤 밤마다 섬에서 돼지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 설화가 전해진다. 섬이 금빛에 휩싸이면 사람들이 사라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는데 최치원이 월영대에서 활을 쏴 섬의 금돼지를 잡은 뒤론 그런 일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최치원의 탄생에 얽힌 금돼지 설화가 있다. 최치원의 아버지가 무장으로 고군산에 온 뒤 그의 부인이 금돼지에게 납치된 것을 구해와 최치원을 낳았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간척으로 이미 육지가 된 내초도에 금돼지굴이 남아 있다.

최치원 선생의 `합포별서`와 `월영서원`의 옛터가 경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자리임이 밝혀짐에 따라 전국에서 유일하게 별장(별서)이 있었던 곳에 2017년 10월에 표지석을 건립하였다. 옛 터 표지석(120×30cm)과 유적 지도(120×90cm), 해설판(120×60cm) 등 3개로 구성되었다.

창원시 진해구 가주동 87-1에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88호인 청룡대가 있다. 청룡대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세상을 피해 지리산에 들어가기 전 낚시를 즐기던 곳이라 전하고 있다. 바위에 `청룡대치원서`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글씨체로 보아 최치원의 친필로 여겨진다. 이를 기리기 위해 경주 최씨 후손들이 청룡대비를 건립하였다. 당시에는 이곳에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매립하여 육지로 변하였다.

부산광역시에 있는 해운대 지명도 최치원에게서 유래되었다. 지금도 최치원이 새겨놓았다고 알려진 해운대 글자가 동백섬에 남아있다. 최치원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인연으로 최치원이 중국에 있을 때 머물렀던 장쑤 성 양저우시 웨이양구와 해운대구가 자매결연을 체결하였다. 양주시에는 최치원 기념관도 있는데, 중국에서 첫 번째로 세워진 외국인 기념관이라고 한다.

양주시는 2001년 10월 최치원 선생이 관료생활을 했던 `당성유지(唐城遺址)`에 100평 규모의 `최치원 사료 진열관`을 마련한 뒤 2003년 8월 최치원 선생 귀국 112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중 문화교류 촉진을 위해 `최치원 기념관`을 건립키로 결정하여 2007년 10월 15일 1,132㎡ 규모의 기념당 건립을 마무리하고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기념식에는 경주 최씨 문중과 최치원기념사업추진회, 한중교류회장, 상해총영사, 중국현정관계자 등 500여명이 참석하였으며, 건립비 100만 달러를 최씨 문중을 비롯한 한국측에서 기부하였다.

2016년 5월 김주수 경북 의성군수는 중국을 방문하여 하광릉 양주부비서장과 교류 의향서를 체결하였다. 의성군과 양주시의 인연은 2015년 11월 하광릉 양주부비서장이 최치원전시관 건립현장 방문을 계기로 상호 우호교류 의향서 체결로 이어졌다. 의향서는 상호 이해와 우의를 증진시키고 행정, 교육, 문화예술, 체육, 경제, 관광, 농특산물 홍보 등 각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교류와 협력을 전개, 공동번영과 발전을 촉진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양 도시는 최치원 문화교류 사업에 초점을 두고 의성군에서 최치원 선생의 호를 딴 `고운사(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권역에 건립중인 최치원문학관 및 전시관과 양주시 최치원기념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 관심사항에 대해 협의하며 사업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전라도 고군산의 해양지역에 최치원에 관한 설화와 유적이 풍부하다. 그 핵심에 군산 옥구가 최치원의 고향이라는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최치원의 출생지는 경주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대표적인 설이 옥구 내지는 고군산 출생설이 있다.

서유구의 『교인계원 필경』의 서문에는 "공의 이름은 치원이요, 자는 해부요 고운은 호이니 호남 옥구 사람이다" 라고 쓰여 있다. 고군산군도는 63개의 섬 중 유인도가 16개다. 그 중 최치원과 관련된 명칭이 여러 곳이다. 대각산은 최치원이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산이다. 

신시도는 고군산도에서 가장 넓은 섬으로 주봉인 월영산 정상에서 최치원이 가야금을 타며 글을 읽었는데 그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고 한다. 옥구향교에는 문창서원이 있어서 최치원을 배향하고 있다. 문창은 최치원이 고려 현종한테 받은 시호다. 대각산과 월영봉 사이에 되내기샘과 그 전설이 있다. 하늘의 은하수가 쏟아져 바다가 되었고, 별들이 내려와 고군산 섬들이 되었다고 한다. 하늘 위 감로수는 땅으로 흘러 되내기샘이 되었는데 밀물 때면 바다에 잠겼다가 썰물 때면 샘물로 솟아나 최치원이 마시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98년 은퇴하여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지리산 등지를 돌아다니다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으며,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에 의하면 그가 머물던 집에 신발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 그의 흔적만 사라졌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후대에는 최치원이 가야산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은퇴 후 전국을 유람해서 남산(경주), 합천의 빙산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해운대, 마산 합포의 월영대 등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최치원은 가야산에 은거하여 900년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벽기, 901년 석순응전과 석이정전, 904년 해인사 화엄선원에 은거하면서 법장화상전, 부석존자전 등을 집필한다. 최치원이 쓴 글 가운데 연대가 밝혀진 것 중 가장 마지막으로 지어진 것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君護國城八角燈樓記)다. 908년에 지어졌으며 수창군(현재의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호족 이재가 부처의 힘으로 국가의 위기를 타개해 줄 것을 빌며 지은 팔각등루의 연원을 적은 기록이다. 최치원은 857년생이므로 51세 무렵의 일이다.

은거 이후 최치원의 말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조선 시대의 서유구(1764~1845)가 한 주장이다. 서유구는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후 호남 지방에 전해 온 최치원의 사적들을 접하고 감명을 받아 이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서유구의 주장에 의하면 최치원은 충청도 홍산의 극락사 뒤편에 묻혔다고 한다. 서유구는 풍산 홍씨 홍석주(1774~1842)의 집안에 소중하게 전해 온 『계원필경집』을 빌려 이를 활자본으로 간행하여 최치원의 책을 세상에 선보인 인물이다.

전국 지자체 중 최치원과 인연이 있는 곳들은 최치원 마케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며 나아가서 최치원 기념관이 있는 중국 강소성 양주시와 자매결연 체결과 교류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양산시도 양산팔경인 임경대를 능동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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