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의 삼국시대 지명인 `삽량주`라는 지역명이 처음 불려기 시작한 것은 7세기경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신라 최초의 주(州)라 할 수 있는 실직주(悉直州)는 6세기 초인 신라 지증왕 6년인 505년에 설치. 따라서 삽량주는 적어도 박제상이 일본에서 순국을 한 5세기에는 생길 수 없는 지명. 따라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삽라군`이 바로 삽량주라는 지명이 탄생하게 된 모태가 된 지명으로 봐야하고, 문제의 이 삽라군에 등장하는 `삽라`는 복수의 최고 권력자가 하늘에 맹세했다는 삽혈의식의 특성상 복수의`라(羅)`가 피를 마시고 서로의 신의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다짐한 것으로 이해. 여기서 등장하는 복수의 `라(羅)`는 바로 `가라(加羅)`와`신라(新羅)`이며, 이를 기리기 위해서 `삽라군`이라는 지명이 탄생한 것으로 봐야하고, 이후 신라시대 지방명칭에 신라의 국호를 뜻하는 `신(新)`와 `라(羅)`자가 모두 다른 글자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삽라`는 `삽량`으로 바뀐 듯.

1. 2004년에 촬영된 교동 뒤쪽에 위치한 마고산성 내 제단으로 추정되는 유적.

이전 글에서 양산의 삼국시대 지명인 `삽라(?羅)` 또는`삽량(?良)`은 삽혈의식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기술하였다. 사전적 의미로`삽(?)`이라는 한자가 자체가 맹약으로 피를 마신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삼국시대 양산지역의 지명으로 문제의 삽라 또는 삽량이라는 명칭을 쓰고자 했을 때는 양산지역이 `삽(?)`이라는 한자 또는 삾혈의식??nbsp;관련된 어떤 역사적 이벤트와 연관 지어야겠다는 의지가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보다 구체화 된다. 

삽혈의식은 복수의 단체 또는 사람이 하늘에 어떤 일정한 의식을 치르며 약속, 맹약(盟約)을 다짐하는 절차이다. 다시 말해 삽혈의식이라는 서로의 배신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물론 요즘같이 신(神)이라는 존재감이 옅어질대로 옅어진 현대에는 삽혈의식이 그다지 매력이 없는, 어쩌면 코웃음칠 일이지만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고 제정(祭政)이 분리되지 못하던 삼국시대에는 하늘이나 신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만약 `삽라(?羅)` 에 등장하는 가라(금관국)와 신라가 삽혈의식을 거행하며 동맹을 맺었다면 그에 대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그것은 아마도 건국초기 양산지역에서의 잦은 충돌 때문이 아니었을 까 추정된다. 

2. 제단 추정 유적 뒤쪽에 서 있는 두 개의 입암(立巖) 중 정면에서 왼쪽 입암 동쪽 사면에 원시형태의 금석문이 각인되어 있다.

 

가라, 즉 금관국의 건국시기는 A.D. 42년이고, 신라의 건국시기는 B.C. 57년이다. 역사 기록의 오기 또는 오류를 감안하고 가라(금관국)과 신라의 건국시기를 조정한다면 결국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것으로 봐도 별 무리가 없으리라 사료된다. 일반적으로 건국 초기 왕권을 어느 정도 확립한 이후에 공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가정 하에서 가라(금관국)과 신라 역시 공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최소한 건국초기만큼은 신라와 금관국은 양산지역에서 군사적 충돌이 잦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금관국와 신라는 영토확장관련으로 분쟁이 잦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금관국은 동진하는 아라가야로 대표되는 주변 가야국과 충돌이, 신라는 소백산맥 너머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백제와 고구려의 잦은 침공을 받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가라(금관국)의 경우는 초기부터 철기로 무장한 군사력을 보유한 탓에 동진하는 아라가야 및 주변 가야세력을 효과적으로 요격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신라는 초기 군사력이 주변국에 못미친 탓에 초기 전쟁에서 승전보다는 패전이 많았던 것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적고 있다. 때문에 가라(금관국)보다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에 전념할 수 있도록 양산지역에서 가라(금관국)과의 전선에서 안정을 원했을 것이다. 반대로 가라(금관국) 역시 동진하는 아라가야 및 주변 가야세력을 창원 인근에서 막아내기 위해서는 신라와 전략적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즉, 건국 초기 가라(금관국)과 신라는 서로의 당면한 주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양산지역에서 형성된 전선의 안정을 원했을 것이고, 이를 위해서 삽혈의식을 치러 영원한 혈맹으로서의 맹약을 서로 다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증표의 하나로 현재 양산지역을 가라와 신라의 `羅`자를 조합하여 서로 동맹이며, 하나라는 의미로`삽라군(?羅郡)`이라 불렀을 개연성은 농후하다. 또 삽라군이라는 의미를 되새기면 `가라와 신라가 양산지역에서 삽혈의식을 하고 서로 동맹을 맹세하였다.`라는 의미도 된다.

지난 양산신문에 삽혈의식과 관련하여 가라(금관국)의 국왕 수로왕의 첫째 딸과 신라와 국왕 석탈해의 아들이 혼인하였다는 사실이 있음을 소개하였다. 사실 삽혈의식의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는 서로 자식을 나눠 갖는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신라는 물론이고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왕권 확립을 위해서 왕이 지방호족 또는 조정대신의 딸과 결혼하는 일은 매우 흔했다. 따라서 삽혈의식 후의 맹세의 이행조건으로 수로왕과 석탈해는 서로의 자식을 혼인시켰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삽혈의식이 행해지게 된 시기가 수로왕과 석탈해의 재위 기간 이외일 수도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눈여겨 볼만한 기사가 있다. 

十七年, 秋七月, 暴風自南, 拔<金城>南大樹. 九月, <加耶>人襲南鄙. 遣加城主<長世>拒之, 爲賊所殺. 王怒, 率勇士五千出戰, 敗之, 虜獲甚多.

17년 가을 7월, 남쪽에서 폭풍이 불어와 금성 남쪽에 있는 큰 나무가 뽑혔다. 9월, 가야 사람들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다. 성주 장세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그가 전사하였다. 왕이 노하여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노획한 물자가 매우 많았다.

위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17년, A.D. 96년의 기사이다. 위 기사에 따르면 A.D. 96년 9월에 가야가 신라의 남쪽 변경을 습격하여 성주 장세를 죽였다는 기록이다. 이에 파사 이사금이 정예병 5천을 끌고 가 가야군을 물리친 것으로 나온다. 물론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래의 사료를 보면 가야의 정체를 알 수 있다. 
 
開皇(개황)五十五年 丙申(병신) 二月에 元君 第九子 ?德(이덕)이 誕生(탄생)되고 우리 軍(군)이 徐羅柵(서라책)인 馬頭(마두)를 쳤다. 同年九月에 우리 軍(군)이 加召柵(가소책)을 치니 柵主(책주) 長世(장세)가 戰死(전사)하다. 斯羅(사라)는 大兵(대병)을 거느리고 다시 와서 싸우니 우리가 물러섰다.
 
위 사료는 2008년경에 필자가 발굴한`개황력(開皇曆)`의 일부분이다. 개황력은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를 집필하는데 있어서 기초적인 사료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발굴된 개황력은 원전이 아니라 필사본이었고, 그나마 그 필사본마저 찾을 수는 없었다. 지금 위의 사료는 필사본은 해석한 해석본이다. 사실 지금도 이 필사본을 찾기 위해서 노력 중이지만은 아직까지 소기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다. 

위에 소개된 사료는 가라(금관국) 수로왕 55년인 A.D. 96년경의 `사라(斯羅)` 다시 말해 신라와 가라(금관국) 간의 전쟁을 기술하고 있다. 일부분만 제외하고는 두 사료는 거의 일치하는데, 가라(금관국)와 신라가 양산지역(물론 양산 어느 지역인지 특정할 수는 없다)에서 군사적 충돌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사료의 내용을 볼 때 상호 거의 1만에서 2만에 가까운 군사가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는 가라(금관국)과 신라 모두 엄청난 희생 또는 국력을 낭비하였을 것이라 짐작되고도 남는다. 어쩌면 이 전쟁 이후에 가라(금관국)와 신라는 군사적 충돌을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의 사료가 주목된다.  

3. 입암에 새겨진 금석문을 확대 촬영한 사진으로, 각인된 글자 일부가 보인다. 2006년경에 대구에서 방문한 금석문 학자들이 해당 금석문을 탁본으로 떠서 분석한 결과, 글자에 `-나(羅)`와 `가라(加羅)`가 포함되어 있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다시 말하자면 마고산성 위에 오른 가라(금관국) 수로왕과 신라의 탈해왕 또는 파사이사금이 서로의 입술에 피를 바르고 삽혈의식을 한 후에 그 맹세의 서(書)를 새겨 놓은 것이 바로 위의 사진이 아닌가 추정된다.

 

開皇(개황)五十六年 丁酉(정유)正月에 斯羅(사라)와의 싸움이 잦음을 哀惜(애석)하게 여기시고 元君은 和平(화평)하게 살도록 德(덕)으로 달래여,  使臣(사신)이 오고가고 平和(평화)가 왔다.

위 사료는 개황력 중에서 가라(금관국) 수로왕 56년, A.D. 97년 경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위 사료에 따르면 96년에 양산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적 충돌을 겪은 가라(금관국)와 신라가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음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말미에 `使臣(사신)이 오고가고 平和(평화)가 왔다.`라고 단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데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A.D. 96년의 양산지역에서 있었던 양국 간의 군사적 충돌로 인해 크나큰 희생과 물자 낭비를 경험한 가라(금관국)과 신라가 전쟁 이후 불과 4개월 뒤에 삽혈의식을 치르고 동맹을 맺은 것으로 봐야할 듯싶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결과가 위 개황력 사료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즉위 원년인 1455년에 회맹단에 오른 세조는 단 아래에 모인 계유정란(癸酉靖亂)의 핵심공신들을 향해 "각기 맹세한 말을 받들어 혹시라도 변하는 자가 있다면 용서하지 마소서"라고 말한 후에 칼을 들어 공물로 오른 짐승을 찔러 피를 내어 그릇에 받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입술에 발랐다. 그리고 공신들 역시 차례대로 피를 입술에 바르고 맹세를 지킬 것을 다짐하였다(사진 출처: KBS1TV `역사저널 그날`직접 캡처).

삽혈의식에서 `삽혈(?血)`이란 맹세 시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입술 혹은 마시는 과정을 통해 입술을 피로 물들인 후 서약을 꼭 지킨다는 `단심(丹心)을 신에게 맹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삽혈의식은 고대중국사회의 경우 국가적 차원에서 약속이나 중요사실에 대한 약속 시 행해져 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삽혈의식은 고대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맹세 의식으로, 주로 국가 간의 왕들 사이의 맹세 의식이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산 위에 제단을 쌓고 엄선된 흰 백마를 잡아 그 피를 서로 마시고 맹약을 다짐한 뒤 맹약문을 단 북쪽에 묻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9(강돈구, `新羅別記所載 삽혈의식의 過程`, `종교학연구`3권,  서울대 대학원, 2001).

모수가 楚왕의 좌우 신하에게 말하기를 닭, 개의 피를 가져오라하여, 모수가 동반을 받들고서 꿇어앉아서 楚왕에게 가로대, "왕께서는 마땅히 피를 마셔 (합)종을 정하십시오, 다음은 우리 임금이요, 그 다음은 모수라" 하며, 마침내 전상에서 정종(합종을 정함)하고, 모수가 왼손으로 쟁반의 피를 잡고 오른손으로 십구 인을 불러,"공들은 서로 더불어 이 피를 받아 마셔라, 공들은 보잘 것 없으니, 이른바 남으로 더불어 일을 이루는 자들이다" 하였다. 
 
위 사료는 중국 25사 중 하나인`사기(史記)`중 평원군전(平原君傳)의 한 구절로써,  모수가 초왕과 닭과 개의 피를 서로 나누어 마시고(?血) 충성의 서약을 하는 장면을 나타낸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삽혈의 의식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 목적 역시 알 수 있다. 위의 사료를 통해 중국의 경우 춘추전국시대부터 이미 삽혈의식이 어느 정도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삽혈의식과 관련하여 또 다른 사료로는 `맹자(孟子)`가 있다. 

5명의 패자 중에선 제나라의 환공이 가장 강성했다. 규구에서 회맹했을 때, 제후는 다만 묶어놓은 희생우 위에 서약서를 올려놓았을 뿐이며, 소를 죽여 피를 입가에 칠하지는 않았다. 그 서약서에는 제1조 불효자는 죽이고 후계자는 바꾸지 않으며 첩을 정실로 삼지 않을 것. 제2조 현자를 존중하고 재능 있는 자를 육성하며 유덕한 사람을 표창할 것. 제3조 노인을 공경하고, 나이 어린 자를 소중히 여길 것. 빈객과 여행자에 대하여 염려할 것. 제4조 선비에게는 관직을 세습케 하지 않을 것 및 겸직케 하지 않을 것, 선비를 채용하려면 반드시 적재(適材)를 얻을 것, 함부로 대신을 죽이지 말 것. 제5조 황하의 둑을 구부려 쌓지 말 것. 곡물 수출을 금지하지 않을 것. 남에게 토지를 주어 영주로 삼았을 때는 반드시 맹주에게 보고할 것. 등의 5개조로 이루어지고 마지막에는`우리 맹세를 함께 하는 자기 이미 이 맹약을 맺은 바에는 서로 우호를 유지해 가자`라고 끝맺었다. 그런데 지금 제후는 이 5개조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의 제후는 5패의 죄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위에 소개된 사료는 `맹자`에 실린 제나라 환공의 규구(葵丘)에서 가진 회맹(會盟)에 관한 내용이다. 이 내용에서 소를 죽여 그 피를 입가에 바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앞서 소개된 사료와 마찬가지로 소라는 희생물의 피를 입에 바르고 결의를 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소를 죽여 그 피를 입가에 바르지 않아 맹서의 효력이 없다는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맹세 혹은 서약에 있어서 삽혈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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