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선생은 868년 12세의 나이에 당나라 유학을 떠나 빈공과에 장원급제하고 당나라 지방 관리를 지냈다.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고변이 황소(黃巢)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자, 그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였다. 황소를 성토하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유명해졌다.

그는 884년 귀국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를 건의하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부패하고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6두품 출신으로 한계를 느끼고 관직에서 은퇴하여 지리산 계곡 등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글을 남겼다. 부산, 양산에도 들러서 시를 남겼는데, `황산강 임경대` 덕분에 양산팔경이 되었다.

최치원은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신라의 고유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나아가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난랑(鸞郞)`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에서 유교와 도교, 불교를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풍류도`를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제시하고 있다.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유불선 사상에 통달한 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의 발자취는 경남 지역 곳곳에 미치고 있다. 산청군의 지리산 자락에는 최치원의 호를 딴 `고운동`이 있는데, 시천면 반천마을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고운동에는 고운이 노닐다 갔다는 `배 바위`가 있다. 생긴 그대로 배의 모양을 하고 있다. 뱃머리의 날렵한 모양은 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하다.

고운동 산자락에는 대나무와 야생차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산 전체가 대나무로 무성하고, 대나무를 베어낸 자리에는 차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주민들에 의하면 최치원이 차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쌍계사 입구에 나란히 서있는 양쪽 바위에 각각 쌍계석문(雙溪石文)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최치원이 여기를 지나는 길에 지팡이로 썼다고 한다. 쇠지팡이로 쓴 글자라 하여 철장서(鐵杖書)라고 한다. 지팡이로 `삼신동(三神洞)`이라는 글자를 쓴 것도 화개동에 남아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5년 1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2015 중국 방문의 해` 개막식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며 통일신라시대 대학자 최치원(崔致遠)의 시를 인용했다. 시 주석은 축사에서 "중한의 문화교류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며 "한국 시인 최치원은 `동쪽나라 화개동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라는 시로 한반도를 찬양했다"고 밝혔다. 하동군의 화개동은 최치원 덕분에 중국에까지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쌍계사 경내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길 가운데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날아갔다는 환학대(喚鶴臺)가 있는데, 이곳에서 진감선사대공탑비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선생이 말을 타고가다 머물렀던 말 발굽의 흔적 `마족암(馬足岩)`도 환학대 위쪽에 있다. 최치원 이후 선비들은 푸른 학이 노닌다는 청학동을 찾아 다녔고 또 기록을 남겼다.

최치원은 해인사 대적광전 서쪽 언덕에 작은 정자를 짓고 그가 지낸 한림학사란 벼슬이름을 따 학사대(學士臺)라 했다. 여기서 선생이 시를 짓고 유유자적하며 만년을 보냈는데, 가야금을 켜면 수많은 학이 날아와 고운 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평소에 사용하던 지팡이를 여기에 꽂아 두어 살아난 전나무가 천연기념물 제54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의 나무는 원래의 후계 나무로 추정된다. 지난 10월 양산문화원 해인사 답사 때 빗속에서 전나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최치원은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지리산 법계사에 자주 왕래하였다. 축지법으로 함양에서 문창대까지 단숨에 오갔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문창대에 올라 서쪽 건너편의 향적대 부근 바위에 과녁을 만들어 놓고 활쏘기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곳을 시궁대(矢弓臺), 또는 고운대(孤雲臺)라고 불리다가 훗날 최치원의 시호인 문창후(文昌侯)를 따서 문창대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최치원은 이 바위에 올라 먹을 갈아서 글을 쓰곤 했는데 글을 쓰던 물이 바위 중간층 돌 틈에 고여 있는데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일부러 물을 퍼도 3일 안에 반드시 비가 내려 다시 물이 고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역에서는 가뭄이 들면 이 바위의 물을 퍼내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최치원과 관련된 푸조나무(경남도 기념물 제123호)가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산37 신흥마을의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장 앞에 있다. 우리나라의 푸조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푸조나무는 신라 말기 최치원이 신흥사에 머물 때 꽂아 둔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자랐다는 전설이 전한다. 전설에는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자신도 살고 이 나무가 죽으면 자신도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최치원이 세상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속세에서 더러워진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洗耳岩)이 푸조나무가 내려다보는 마을 앞 냇가 건너편에 있다.

최치원은 세이암에서 속세의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됐다고 한다. 여기는 물이 맑고 바위가 많아 게가 살기 좋은 곳이지만 게가 없다고 한다. 이곳에서 몸을 씻고 있는 최치원의 발가락을 게가 물었다. 최치원은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며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한 이후로 게가 사라졌다고 한다.

함양의 상림 숲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상림은 최치원이 천령군(함양) 태수로 있던 시절 만든 마을 숲이다. 어느 날 최치원의 모친이 상림에 나갔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얘기를 들은 최치원은 곧바로 숲으로 달려가 "모든 해충은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말라!"고 하자 그 이후 뱀이 사라졌다고 한다.

마산의 월영대는 최치원 선생이 대(臺)를 쌓고 해변을 거닐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최치원이 사찰과 명산대천을 두루 다니다가 마지막 정착지로 이곳을 택하여 가족과 더불어 살다가 신라 멸망을 예견하고 합천 해인사로 은거하였다.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한 고려, 조선의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이곳은 우리나라 선비의 순례지가 되었다.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경남의 양산시,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청군, 함양군, 합천군, 하동군이 공동으로 최치원 관광코스를 조성하고 홍보를 해나가면 관광객 유치 효과가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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