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원효대사 탄신 14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로 전국에서 각종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양산은 원효대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으며, 천성산에서 수도하던 원효대사를 찾아온 요석공주와 설총 때문에 산막리란 지명이 생겼다. 원효대사는 중국에서 건너온 천 명의 제자를 천성산에 89암자를 짓고 수용하고, 천성산 화엄벌에서 화엄경을 강독하여 성불시켰다. 이와 같은 깊은 인연에도 양산에서는 원효대사 선양사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원효대사 동상도 없고, 유적지에 안내 표지판도 제대로 없는 실정이다.

원효대사가 백성들에게 다가가 불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중 교화를 시도한 것은 당시 불교가 왕실불교, 호국불교, 귀족불교였기 때문이다. 원효대사의 생존 시기는 전쟁이 일상사로 거의 매년 전쟁을 치렀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몹시 피폐하여 빈궁함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국가에 징집되어 군인이 되어도 충분한 식량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전쟁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심을 느꼈다. 일반 백성들은 불교에 의지하여 삶의 위안을 받고 싶어도 한문으로 된 어려운 경전을 읽을 수도 없었다.

당시의 승려들 대부분이 왕실과 귀족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지방의 촌락이며 시장거리며 뒷골목을 승려가 아닌 세속인의 모습으로 무애가를 지어 부르고 가무와 잡담으로 서민들 사이에 끼어들어 불법을 설법하는 교화작업에 힘썼다. 승려들은 그런 기이한 행색의 원효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원효대사는 자신을 한없이 낮춘 자유로운 성자였고 백성과 천민의 벗이었다. 가난한 사람, 천민, 부랑자, 거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원효를 허물없이 따랐다. 그들은 원효대사 염불과 노래를 쉽게 따라 부르며 극락정토에 태어날 희망을 키웠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원효불기(元曉不羈 : 원효는 얽매이지 않는다.)에 원효대사의 자유로운 행적이 나온다. 원효는 이미 계를 어겨 설총을 낳은 후에는 세속의 옷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였다. 자신은 다른 일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작고 미천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소성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우연히 광대들이 춤출 때 사용하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하였다. 그래서 그 모양에 따라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의 한 구절인 "일체 무애인(無碍人 : 장애가 없는 자유로운 사람)은 한 번에 생사에서 벗어난다."라는 구절에서 따서 무애(無碍)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무애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시키고 읊조리며 다녔으니, 가난한 사람들과 산골에 사는 무지몽매한 자들까지도 모두 다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모두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는 위대하다 할 것이다.

그가 태어난 마을을 불지촌이라 하고 절을 초개사라 하였으며 스스로의 이름을 원효라 한 것은, 아마도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원효라는 이름도 역시 우리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우리말로 원효를 일러 `새벽[始旦(시단)]`이라고 하였다.

원효대사는 무애무와 같은 쉬운 노래와 춤을 고안하여 신라의 귀족불교를 일반 서민들에게 확산시켰다. 무애사상의 구현을 위해 원효는 무용과 음악예술의 대중파급력 파악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였던 것이다. 원효의 대중교화사상은 `귀일심원(歸一心願) 요익중생(饒益衆生)`이라는 말로 정리되며. 그에게 시급했던 것은 깨달음을 학(學)을 모르는 일반 중생들에게 살아있는 언어로 전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원효의 대중교화관과 무애사상을 축약하여 예술의 형태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무애무였던 것이다. 

귀일심원은 원효(元曉) 사상의 핵심으로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다. 귀심원(歸心源), 환원(還源), 환귀일심(還歸一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원효는 불교의 목표를 모든 중생들이 각자 자기 마음의 근원으로 되돌아가 모든 중생과 더불어 한마음이 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의 `귀명삼보게(歸命三寶偈)`를 풀이하면서, 귀명삼보가 곧 `귀일심원`임을 천명하였다.

요익중생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중생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의미한다. 물에 사는 물고기는 물이 필요하고, 숲에 사는 동물은 숲이 필요하다. 이롭게 하는 것이란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베푸는 일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주고, 배고픈 사람에겐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사람에겐 약을 주는 것이다.

무애인은 부처의 호의 하나로, 부처는 열반의 무애한 도를 증명했기 때문에 부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깨달은) 사람은 한길로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 는 불교적 교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려고 한 것이다. 무애무는 비록 불교의 의식 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원효대사가 불법의 포교를 위해 무애가를 부르며 바가지 탈춤을 추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익살스럽고 웃음 섞인 각설이 춤이나 거리광대 춤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규보(1168년 ~ 1241년)의 시에도 소성거사가 나온다. 영(聆) 수좌(首座) 족암(足庵)에게서 소성거사(小性居士)의 상을 보고 삼가 두 번 절하고 나서 찬(贊)을 짓는다. 머리를 깎아 맨머리면 원효대사요. / 머리를 길러 관을 쓰면 소성거사로다. / 비록 몸이 천이나 백으로 나타난다 해도 /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으니 / 이 두 가지 형상은 다만 한 마당의 유희일 뿐이지.

중국 북송 시대의 승려로 속성은 왕(王)인데, 28세에 취암삼(翠巖參)에게 승려가 되고, 천태 덕소(德韶) 국사에게서 선지를 깨달은 뒤 법안종(法眼宗) 제3대조가 된 연수(延壽, 904년 ~ 975년)는 `원효는 대오대철(大悟大徹)한 이`라고 찬양하였다. 원효대사는 그 지혜가 해와 달에 해당하고, 그 식견이 인천(人天)을 꿰뚫어, 크나큰 정법(正法)을 모두 얻고, 진여(眞如)의 깊은 곳을 모두 통합하였으니, 스님은 과연 대오대철(大悟大徹)한 분이다.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에서 보인 탁월한 이해와 견해는 중국의 고승들까지도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전국의 모든 지자체에서는 역사적 위인들의 유적을 성역화하고 외지 관광객 유치에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양산시는 원효대사 선양사업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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