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여 년 전에 생산된 철기 중 `양산표(梁山標)`를 가려내기 위한 척도는 금관국 특유의 철정 제조방식인 초강법(炒鋼法), 물금광산에서 생산된 철광석에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는 비소(AS)가 함유 여부, 철기에 포함된 규소(Si)의 성분 함량. 이중 규소(Si)는 제련로(製鍊爐) 제작에 반듯이 쓰이는 주재료인 황토 속에 포함되어 있다가 철광석 용융과정에서 쇳물에 혼입. 따라서 철기 속에 존재하는 규소(Si) 성분 함량과 양산지역 황토 속에 존재하는 규소 성분을 분석하여 비교해 볼 경우 유의미한 결과 획득할 가능성 커.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에 대한 2차 발굴조사를 통해 발굴된 백제 제철유적 (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


금관국(金官國) 금관국이 1세기부터 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남부의 철기생산 선진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주 요인으로 주변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제련(製鍊)기술을 확보와 이를 끊임없이 발전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제련기술은 채취한 철광석에서 쇠를 뽑아내는 매우 중요한 기술이었고, 철기생산 공정에 있어서 핵심 중의 핵심 공정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제련 단계에서 불순물이 거의 없는 높은 품질의 철정을 생산해낸다면 제련 이후에 뒤따르는 공정인 정련(精鍊)이나 단야(鍛冶) 공정에 투입되는 인력이나 시간을 대폭 줄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간이나 인력 절감은 짧은 시간 내에 질 높은 철기를 제작할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제련로는 철기 생산에 있어서는 반듯이 거쳐야 하는 필수 공정이랄 수 있다. 때문에 지금 발굴되는 삼국시대에 제조된 철기들은 모두 제련로를 거쳐 생산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1500도 이상의 열을 가해야만 하는 제련공정 과정에서 제련로 제작에 쓰인 재료들에 함유된 일부 성분이 철기 속으로 혼입되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이러한 가정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현재 일본에서 발굴되고 있는 철기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6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자체적으로 철을 생산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서 니시타니 다다니(西谷 正) 前 규슈대 교수는 한 지역 언론(국제신문 2003. 4. 3)년과의 인터뷰에서 왜 지역은 3세기경부터 가야(금관국)지역에서 철을 수입하기 시작했고, 4세기 이후부터는 가야의 토기와 갑주, 마구 등이 들어왔는데, 일본열도에서 자체적으로 철 생산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근 300년 동안 가야(금관국)로부터 대부분 수입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흘 밝혔었다. 그러던 것이 5세기 무렵에 제한적으로 일본 열도에서 철 생산이 이루지기 시작했고, 6세기 중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철 생산이 이루어지게 되는 데, 이는 532년에 금관국이 신라에 병합된 이후, 금관국의 철기술자들이 일부 일본으로 건너 간 영향인 것으로 분석된다. 관련해서 일본에서의 제철관련 유적은 4세기 ~ 5세기 후쿠오카현과 미야기현을 중심으로 발견된 대장장이(단야, 鍛冶) 공방이 조사 되었을 뿐이고, 일본 내에서 채굴된 철광석으로 철을 제련한 것으로 보이는 제철로(製鐵爐) 유적은 6세기 후반 무렵에 가서야 나타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스즈끼 히데요, `일본의 역사선생님이 쓴 한국 일본 두 나라 역사 이야기`, 역사넷, 2003).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고도로 발달된 제련 및 제철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금관국의 제철 기술 인력이 일본으로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는 6세기 후반부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에 대한 2차 발굴조사를 통ㄷ해 발굴된 백제 제철유적 중 4호 제련로(사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일본 내에서 발견되는 철관련 유물이 삼국시대 양산지역에서 생산됐을, 이른바 양산표(梁山標) 철기를 찾는 데 중요한 이유는 일본 내 고분에서 출토된 철기 유물 중에서 초강법이 적용된 유물의 금속학적 성분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前 충남대학교 사범대학 기술교육과 노태천 교수는 1999년에 발표한`韓國古代冶金技術史 硏究`를 통해 일본지역에서 발견되는 철제 유물의 성분을 분석하여 철기관련 유물 내에 특정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보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일본에서 발굴된 고대 고분에서 출토된 철 관련 유물 중에서 초강법으로 확인된 것은 주로 5세기 후반부터  8세기 사이에서 보이고 있으며, 이는 일본지역에서 5세기 후반의 초강법 적용 철기가 동시대에 철정(鐵?)이 함께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일본산 철광석을 이용하여 초강법을 통해 생산한 철기가 아니라 금관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 내의 초강법 적용 철기의 금속학적 분석에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는 데, 바로 철기에 포함된 Si(규소)와 Cu(구리)의 성분함량이다. 
이는 초강법으로 제작된 것이 확인된 일본 고대 고분군 출토 철제품 중 5세기 ~ 6세기 사이의 것에는 규소(Si)가 최저 0.047%에서 최고 0.58%까지 포함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데, 직접비교는 다소 무리가 따를 지는 몰라도 1세기 ~ 5세기의 기간 동안에 금관국 세력하 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에서 출토된 초강법 적용 철기에 포함된 규소(Si)는 최저 0.12%에서 최고 6.31%까지 분석된 결과와 비교해 볼 때 서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규소(Si)는 주로 모래 속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제련 과정에서 노의 제작에 쓰인 진흙 및 황토를 통해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 쪽 철제품에는 평균 0.2%로 규소의 함량이 극히 낮은 반면 금관국 철제품은 평균 2.29%로 거의 10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를 백제지역 출토 철기와 비교하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초강법으로 제조된 것이 확인된 2세기 ~ 5세기 전반까지 백제 철제품의 규소 함량이 최저 0.09%에서 최고 0.919%로 평균 0.308% 분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의 철제품에 적용된 기술이 금관국보다는 백제와 관련성이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게다가 일본의 철제품에는 구리(Cu) 성분이 일정성분 이상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백제지역에 구리성분을 포함한 자철광 산지가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왜의 주요 철 수입루트가 초기 금관국에서 점차 백제로 변화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소장 최병선)가 27일 충북 충주시 연구소에서 고대 제철로를 복원해 철생산 실험을 하고 있다. (사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결국 앞서 언급한 제련로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진흙과 황토로 만들어지고, 진흙과 황토는 제련로를 만들 지역에서 조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때문에 철기에 포함된 규소(Si)의 성분 함량과 양산지역에서 제련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진흙이나 황토 속에 포함된 규소 성분 함량을 조사해 비교한다면 분명 매우 특별한 결과를 도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앞서 제시한 대로 금관국에서 생산한 철의 중간소재인 철정(鐵鋌)은 초강법으로 생산되었다. 여기에 물금광산에서 생산되는 철광에는 비소(As)가 풍부하다. 여기에 제련로 제작에 쓰인 진흙이나 황토에서 유입된 규소(Si) 성분 함량을 비교한다면 삼국시대 금관국 지배하 양산지역에서 생산한 철기(鐵器)를 찾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뛰어난 철 생산 기술과 시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뛰어난 철기군단을 보유했던 금관국이 532년에 신라와 합병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두고 많은 견해와 이론 그리고 반론이 존재하고 있다. 그 중에서 최근 가장 설득력을 얻는 것 중에 하나가 김해지역의 융기로 인한 천혜의 항구를 잃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가정이다. 

김해지역에는 금관국과 관련된 중요한 고분군이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양동리 고분군이고, 또 하나는 대성동 고분군이다. 이 두 고분군은 금관국의 1세기 ~ 4세기경의 상황을 가늠하게 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두 고분군 중에서 양동리 고분군은 1세기 ~ 3세기, 대성동 고분군은 2세기 ~ 4세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발굴 결과 밝혀졌다. 그런데 전체적인 조성상태나 출토 되는 유물로 판단해 볼 때 대성동 고분군 쪽이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금관국 초기의 중심지는 양동리 고분군 인근이었다가 어떤 이유로 인해서 차츰 대성동 고분군 인근 지역 쪽으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동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를 두고 많은 역사학자들이 다양한 설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지질학적인 견해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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