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출신으로 서울대 총장을 지냈고 한국 정치학계의 큰 별이었던 고(故) 박봉식 박사가 별세한 지도 달포가 훌쩍 넘었다. 지난 11월 1일이 49재일이었다. 이승에서의 삶을 다하고 영면에 든 고인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고인이 지난 9월 14일 오후 세상을 떴다. 향년 85세. 부음을 받았던 당시의 순간이 떠오른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인간사에 슬프지 않는 죽음이 어디 있을까만 내게 고인의 부고는 남달랐다. 49재일까지 지난 지금 이 순간도 가슴 한 켠이 아리고 슬프다. 고인이 생전에 꾸었던 정치적 꿈을 믿고 따랐던  인연 때문만은 아니다. 한 동안 잊고 있던 고인의 꿈들이 죽음 앞에서 다시 큰 아픔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당신의 꿈,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애썼던 고인의 지난 삶이 되살아나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던 것이다. 

고인은 1932년 1월 양산의 산막동 321번지의 한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양산향교에 공적비가 있는 박천수가 그의 할아버지다. 고인은 양산초등학교(32회)를 졸업하고 양산농업학교(현 양산고)를 거쳐(4년 수료), 당시 6년제였던 경남중ㆍ고를 졸업했다. 1951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해 1975년 모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

고, 26세의 나이에 서울대교수가 됐다. 당시 서울대 최연소 교수 임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하버드대학 연경학사 객원교수,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등을 맡기도 했던 고인은 1994년 1월까지 36년간 학자의 길을 걸으며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제17대 서울대학교 총장, 제2대 부산외국어대학교 총장, 금강대학교 총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서울대 총장 재임 시에 중론을 모아 마련한 서울대학교 30년 발전계획은 서울대의 비약적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외활동도 다양하고 폭이 넓었다. 1973년 제28차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고,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 같은 해 평양을 2차례 방문했으며, 80~84년에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으로도 활약을 했다. 평화통일자문회의 정책심의위원장, 통일원 통일정책평가 위원장, 통일원 민족통일연구원 이사장, 최근까지북한연구소 이사장 등을 맡아 통일문제에 대한 연구와 정책개발에도 열정을 바치며 통일전문가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고향 양산에 대한 애착은 더욱 강했다. 양산초 총동창회장과 양산고 총동창회 고문을 맡아 모교의 발전을 지원했으며, 평소 양산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안타까워 했기에 양산교육문화원을 설립ㆍ운영하며 고향의 발전에 기여하고픈 열의를 나타냈다. 부산대학교가 양산캠퍼스 조성을 놓고 부산지역에서 찬반양론이 뜨거웠을 때 양산캠퍼스 조성의 필요성을 음양으로 크게 지원했던 그였다. 하지만 현실정치는 냉혹했다.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 모두 낙선하면서 정치ㆍ통일ㆍ교육 전문가로서의 그의 꿈은 결국 날개를 펴지 못했고, 석학으로서의 명성만을 남기게 되었다. 

고인은 평소 정치적 소신을 밝힐 때면 "정치적으로 합리적인가, 국민의 요구를 충족시키는가를 판단의 준거로 삼는다"고 말하곤 했다. "편안한 양산, 넉넉한 양산, 살맛나는 양산을 만들고 싶다"고도 했다.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울리는 듯하다. 

한 때 고인을 모시면서 듣고 겪었던 많은 일화들은 아직도 잊혀질 않는다. 포항제철 신화를 일군 고 박태준 전 총리의 국회의원 보궐선거(1997년) 지원을 위해 포항으로 가는 길에 들었던 이야기는 아직도 웃음을 짓게 한다. YS정부에서 정무수석을 지낸 바 있고, 서울대 정치학과 동기로 가깝게 지냈던 마산 출신의 우병규 전 국회의원과 술잔을 나누다 국민동요 `고향의 봄`을 낳은 이원수 선생의 고향이 어디냐를 놓고 한판 설전(?)을 벌였단다. 마산이라고 우기는 우 전 의원에게 고인이 이은상의 `가고파`에 나오는 `내 고향 남쪽바다`를 예로 들며 마산사람들은 바다를 빼놓고 고향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고향의 봄` 노랫말에 바다 이야기가 없다며 마산 출신이라는 주장을 일축했단다. 그랬더니 우 전 의원이 1ㆍ2절엔 없지만 3ㆍ4절에 바다가 나온다고 임기응변적(?) 대응을 했고, 순간 당황한 총장님이 그렇냐며 꼬리를 내리고 술값을 다 치러야 했는데, 며칠이 지나고서야 `고향의 봄`에는 3ㆍ4절이 없다는 것을 알고 박장대소 했더란다. 그후 새해때면 항상 기장에 박 전총리댁에 들러 차도나누고 국정을 논하셨다  

고인은 술을 즐겼으나 항상 과하지는 않았다. 소주와 맥주를 좋아했는데 소주는 데워서, 맥주는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마셨다. 술이 한 잔 그윽하면  가요를 읊조리기도 했는데 특히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의 고복수의 짝사랑과 나그네의설움 .애수의소야곡 등 항상 반주는반주대로 노래는늦어 옆에서 총장님 조금빨리하세요 라고해도 끝까지 계속하시던 총장님 이제 지금 어디서 그노래를 다시들어볼수 있을까요?  종교는 부인인 지정숙 여사가 천주교인 것과 달리 불교였다 .1997년 양산 통도사 월하종정스님이 계실 때 신도회장을하시고. 고향을 방문하는 길이면 상북에 있는 성림사를 자주 들렀다. 성림사는 고인의 어머니가 생전에 불공을 자주 드렸던 곳이다. 죽거든 어머니 곁(산막동)에 묻어달라는 말을 자주하곤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지 못하고 천주교 안성공원묘지에 묻혔다.   

부인 지정수 여사도 양산 출신이다. 초대 양산교육감을 지낸 지영대가 여사의 아버지이고, 미 군정 당시 초대 양산군수를 지낸 지영진이 큰아버지이다. 특히 아버지 지영대는 사비를 들여 양산천 다리(국계다리)를 개축해 지금의 `영대교`라는 이름을 낳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고인의 자제로 현재 위덕대학교에 재직 중인 박훈탁 교수가 낸 `지마리아`라는 책은 지 여사의 집안을 왜정 때 20여년에 걸쳐 상해임시정부에 거액의 비밀자금을 보낸 7천석꾼의 집안으로 소개하고 있다. `지마리아`는 지정수 여사의 지칭이다.    

이제 총장님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셨다. 때로는 큰 형님처럼, 때로는 삼촌처럼 후배들을 아꼈고 고향에 대한 정이 각별했으며, 국가발전에 대한 꿈이 남달랐던 분이었다. 

인명은 재천이라 하늘의 부름을 받은것을 어찌하겠는가. 다만, 고인이 남긴 학문적ㆍ정치적 업적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그가 못다 이룬 소신과 꿈이 사라지지 않게 이제 후배들이 그 꿈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다시 한 번 총장님의 영면을 기원하며 마음으로 성심의 국화 한 송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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