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의 단절은 무서운 결과를 낳고 만다. 남북이 갈라진 것도 코드가 엇갈린 때문이다. 동서가 하나 되지 못하는 것도 코드의 차이 때문이다.

여야가 항상 대립하는 것도 생각의 코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부부가 헤어지는 것도 코드의 불일치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의 끝이 없는 다툼도 코드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엇박자도 결국 코드의 문제다.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것은 기실 심각한 문제다.

`코드`라는 말을 학습용어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였다. 그 이후 문화기호론이나 정보이론에서 많이 사용되어 일반인에게도 널리 퍼지게 된 말이다. 그에 의하면 언어는 기호이다. 기호는 무엇을 대신한다는 의미고 기호는 지시물을 대신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서 `예`와 `아니오`를 표시할 때 머리를 끄덕이는 것과 내젓는 제스처, 빨간 불과 녹색 불의 교통신호,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문자 - 무엇이든 서로의 의사소통을 하기위한 기호체계를 코드라 부른다.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는 단어가 있다.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사이를 일컫는 말이다. 

아무리 봐도 싸워야 할 별다른 이유가 없는데 왜 고양이와 개는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 거리는지를 학자들이 연구해 봤다. 이유는 `코드의 차이`였다. 개는 앞다리를 들면 같이 놀자는 신호다. 고양이가 앞다리를 들면 싸우겠다는 신호다. 고양이가 `야옹`하는 것은 만족감의 표시인데 개가 `으르릉`대는 것은 공격의 신호다. 서로의 코드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싸우지 않고 어떻게 배겨 내겠는가.

의사소통을 위한 기호체계를 코드라 했다. 그렇다면 코드는 서로 공유하며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코드는 독과점의 횡포가 아니다. 강자의 전유물도 아니고 약자의 분풀이용도 아니다.

끼리끼리의 술래잡기 놀이는 더더욱 아니다. 

누구나 합의 하에 받아들이고 준수해야 할 기본 중의 기본에 속하는 문제다. 빨간 신호등에는 멈추어 서야 한다는 이 엄연한 기호체계를 나만의 것이라고 누가 주장할 것인가.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기호체계를 누가 독점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 코드의 차이가 끼어 들 틈새라도 있는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이 보통이 아니다. 전(前) 정권을 넘어 전전 정권은 물론이고 전전전 정권까지 칼날을 겨누고 있다. 잘못은 당연히 고치고 바로 잡아야 한다. 

하지만 코드에 따라 잘 잘못이 재단된다면 살아남을 인간은 아무도 없다. 정권이 바뀌면 문재인 정부도 같은 이유로 평안한 날이 없을 것이다.

코드는 그렇게 나쁜 말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나 인지하고 준수해야 할 서로 간의 약속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빨간 신호등은 정지의 표시라는 것쯤은 알겠는데 왜 서야 하느냐고 삿대질을 한다. 질서를 위한 것이고 모두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또 시비조다. 내가 편하면 됐지 무엇 때문에 질서를 지켜야 하느냐고 대어든다. 목숨은 내 것이니까 죽든 살든 간섭하지 말라고 큰 소리 친다. 참 한심한 모습들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박이일 간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모든 국민들은 제발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코드의 관점에서 본다면 별로 고개가 끄떡여지지 않는다. 코드를 이해하는 출발점부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북 간의 코드는 말할 것도 없지만 나라마다 자기가 익혀온 처지에서 코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모든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세대차이가 별로 없는 나라는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유대 민족은 지금도 3~4대 가족이 한 집에 사는 것이 전통처럼 돼 있다. 우리 같으면 갈등에 갈등으로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끄떡없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코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확실한 순종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토라를 읽고 해설하며 신앙을 이끌고 있다. 부모님은 생활을 책임진다. 자녀들은 공경의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한다. 모두가 하나님의 코드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잘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근본적인 문제로 귀착하지 않으면 해결의 실마리는 요원하다. 근본의 바른 기호체계로 돌아가서 합의하고 받아 들여야 해결이 된다. 그렇지 않고는 코드의 코드에 의한 코드를 위한 싸움판이 생길 뿐이다. 근본 중의 근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창조질서로 돌아가는 것이다. 창조질서에 의한 코드만이 기본 중의 기본이고 영원불변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쌍둥이도 세대차이가 난다고 자랑처럼 말한다. 코드의 차이를 은근히 즐기며 끼리끼리의 삶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삿대질은 잠시 멈추고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국의 코드를 냉정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코드에 대한 근본적 이해이고 순종의 여부다. 코드는 얽힘의 제공자이고 해결의 마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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