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500여 년 동안 금관국의 주요 철광석 생산기지였던 양산(梁山). 생산성이 매우 높은 고품위 철광석이 풍부했던 만큼 양산지역에서 철기가 생산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관련 유적은 발견되지 않아. 추후 발굴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따르면 금관국의 철광석 탐지와 철광석 제련 그리고 철기제작 등 철 관련 산업의 수준은 당시 한반도 주변 지역에서는 최고 등급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각종 발굴 조사를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유적이나 유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고, 이를 토대로 한 연구결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금곽국의 철관련 산업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제련관련 유적이 다수 발굴되어야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물론 지난 2009년경에 김해시 진영읍 하계리 462번지 일원에서 제련로관련 유적이 발견되어 학계를 흥분시킨 적도 있다. 그러나 근 600여 년 동안 생산되고 수출까지 된 금관국의 철기의 종류와 양을 생각한다면 이번 하계리 유적의 발견만으로는 금관국의 철기 생산 매커니즘을 온전히 규명하는 데에는 역부족인 것이 사실이다. 

물금 제출유적에서 출토된 제련로 송풍관(출처-양산시립박물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해의 하계리 제련로 유적의 발굴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중국 사서인`삼국지`위서 동이전 변진조(弁辰條) 기록되어 있는 금관국에서 철(鐵)이 생산되는데 한(韓), 예(濊), 왜(倭) 모두가 와서 사가고 또한 시장에서는 철을 중국의 화폐처럼 사용했고 또한 두 군(郡)에도 공급했다는 기록을 공식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련로는 채광 후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1차 제련시설이어서, 단순히 철정을 가지고 철기는 만드는 대장간 등과는 달리 그 지역에서 철을 생산했음을 증명하는 시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간 제련로 유적은 제련이 끝난 후 로(爐)의 안쪽에 남아 있는 철광석에서 흘러나와 굳어진 철괴를 추출하기 위해 로의 벽체의 일부 또는 전체를 뜯어냈기 때문에 그 온전한 구조가 남아 있는 경우를 찾아 보기 힘들었지만 하계리에서 발굴된 제련로는 상부 일부가 아주 양호할 뿐만이 아니라 로의 내부에 있던 철광석을 고온으로 가열하여 물리 ㆍ화학적 성질을 변화시키기 위해 공기를 강제 공급하는 배소시설(焙燒施設)까지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고, 또한 인근에서 철 제련에 종사했던 공인들이 집단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주거지 등도 발굴되기도 했다. 즉, 종합해보면 하계리 철 제련로 인근에 철 생산을 위한 집단 거주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금관국이 단순히 철관련 제품의 유통기지가 아닌 철의 생산지라는 점을 어느 정도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제련로는 채광 후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1차 제련시설로 대장간 등과는 달리 그 지역에서 철을 생산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시설이다. 그간 창원 봉림리 유적은 5세기대의 것으로 추정돼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제련로 가운데 가장 시대가 이르다. 하계리 제련로 유적 발견으로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던 금관국의 철기 생산관련 공정이 상당 부분 밝혀질 것으로 학계는 기대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관련 연구를 통해 금관국이 우수한 철기를 생산하는데 기초가 된 철관련 중간 소재, 즉 철정(鐵鋌)을 어떤 과정을 통해 생산했었는지에 대한 프로세스는 어느 정도 밝혀진 상태다. 철정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철광석, 제련로, 정련로, 노동력 그리고 철의 녹는점까지 철광석을 가열할 수 있는 연료가 필요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철광석에서 암석과 철을 분리해기 위해서는 철의 녹는점까지 가열하는 것이 필수다. 지금이야 철광석을 가열하기 위해서는 코우크스(coke)라는 연료가 쓰이지만 금관국은 숯, 특히 백탄을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숯은 철광석으로부터 철을 뽑아내는 제련, 제련을 마친 철을 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드는 단야에 있어서 필수적인 재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탓에 철관련 유적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숯이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숯은 탄화과정과 탄의 표면에 따라서 흑탄과 백탄으로 나누어진다. 이중 흑탄은 600~700℃로 정련한 뒤 窯 내부에서 자연연소 시켜 2~3일간 가마(窯)안에 두었다가 100℃ 정도가 되었을 때 꺼낸 것을 말한다. 특히 흑탄은 그 자체가 불완전 연소로 인하여 가스를 포함하고 있다. 그로 인해서 비교적 착화가 쉽고 화력이 강하다. 그러나 화력이 좋은 반면 오래 유지할 수가 없는 편이다. 때문에 흑탄은 주로 취사?난방 및 가정에 필요한 생활용으로 이용되어왔다. 반면 백탄은 800~1300℃의 높은 온도로 정련한 뒤 꺼내, 흙과 재를 섞은 소분(消粉)을 덮어 빠른 속도로 강제로 불기를 꺼버리는 것을 말한다. 백탄은 외면이 회백색을 띠고, 탄질이 치밀하고 비중이 크고 굳고 단단하여 고온을 오래토록 유지할 수 있어, 고대부터 제철?제련작업에 이용되어 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주로 백탄이 쓰였고, 이후에는 보다 고열량을 낼 수 있는 흑탄이 쓰였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김호상,「한국의 목탄요 연구현황」,『제531회 문화강좌 교재). 결국 제철산업과 숯 생산은 일정한 괘를 두고 상호 발전해왔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제철산업에 있어서 중요한 백탄을 생산했던 탄요유적이 김해지역에는 어방 및 화정 겨우 2곳에서 조사되고 있다는 점은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조병택,『한국 고대 백탄요 연구』, 2006년). 이는 金官國이라는 나라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도의 제철산업이 발달했던 지역치고는 그에 반드시 필요한 백탄유적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금관국이 당시로서는 거대한 규모라고 할 수 있었던 제철관련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철관련산업 뿐만이 아니라 백탄 생산을 위한 설비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등식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앞서 언급한대로 지금까지 김해지역에서 조사된 탄요 유적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해지역에 이처럼 탄요유적이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금관국이 위치한 지리적 여건이 크게 작용한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금관국의 물금 노천광상에서 철광석 채취하는 상상도(출처:한국생활사박물관06-발해가야생활관, 사계절, 2002)

일반적으로 숯 1톤을 생산하기 위해서 통상 10톤에 달하는 양질의 목재가 소요된다고 한다(박상진, 「천년왕국 신라는 숯으로 망했다」, 2002년 3월 과학동아). 또 철 1톤을 생산하기 위해서 소요되는 숯의 양은 5톤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철 1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5톤의 숯이 필요하고, 5톤의 숯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결국 50톤에 달하게 목재가 소요되는 셈이다.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숯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당시 사용되었던 목재는 주로 참나무류가 주로 쓰인 것으로 관련 유적 발굴 조사 되고 있다. 당시 금관국 영토인 김해지역 및 양산지역 산림지역의 규모를 놓고 볼 때 약 500여 년간의 금관국 제출산업을 충당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군다나 참나무류는 그 성장 속도가 느린 편이다. 따라서 한번 베어진 참나무류가 다시 숯으로 쓰일 만큼의 크기로 성장하기 위해선 거의 20년 전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김해ㆍ양산ㆍ부산 지역의 주요 산에는 스카른광상으로부터 철광석을 채취하기 위한 흔적인 너덜겅이 대규모로 분포되어 있다. 이것은 곧 철광석을 채취하기 위해서 대규모 산림훼손이 불가피했었다는 사실을 간접 확인케 한다. 따라서 당시 금관국은 자국의 영토 내에서 숯을 만들기 위한 양질의 참나무를 톤 단위로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목재는 당시 제철산업 뿐만이 아니라 선박 건조, 가옥 건축, 연료 등에 널리 쓰였을 것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김해지역 산림의 규모는 수백 년간에 걸쳐 진행된 금관국의 제철산업을 지탱해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김해지역과 부산, 양산지역 주요 산지의 규모를 봤을 때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금관국의 제철산업에 소요되는 숯을 자체 해결하기에는 분명 부족했었다고 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금관국은 제철산업에 필요한 숯을 외부에서 공급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이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국가가 바로 신라이다. 신라는 금관국보다는 영토가 훨씬 넓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 만큼 분포하고 있는 산림 지역 역시 넓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는 막대한 양의 숯을 생산해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백탄 유적이다. 현재 국내에서 발견되는 백탄 탄요 유적은 110여개로 조사되고 있는데, 이중 절반이 넘은 53기가 신라 세력권 내에서 발견되고 있다(앞 김호상의 논문). 따라서 신라가 백탄의 숯을 대량으로 생산했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에 비해서 통일 이전 신라의 영토였던 지역에서는 철광석 채광관련 유적은 전무한 실정이다. 물론 최근에 울산 달천지역에서 신라시대 채광 유적이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추후 조사과정에서 발견된 유적이 채광 유적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를 미루어 볼 때 통일이전 신라는 어떤 목적 하에 백탄을 대량으로 생산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목적은 바로 금관국의 무역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삼국시대 숯을 생산하던 시설의 상상도(출처:한국생활사박물관06-발해가야생활관, 사계절, 2002)

당시 신라는 자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철정으로 대표되는 제철관련 원자재를 금관국으로부터 제공받고, 금관국은 신라로부터 철 생산에 필수적인 백탄을 공급받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것이 바로 신라 지역 내에서 발굴되고 있는 철의 성분 중에 비소(AS)가 포함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문제의 비소(AS)를 함유한 철광석은 양산 물금과 달천지역 뿐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발굴을 통해 확인 된 바로는 울산달천에서는 적어도 신라시대에 철광석을 채광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발표되었다. 그렇다면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품 재료의 원산지는 경남 양산 물금지역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경주에서 대규모의 철광산이 존재했었다면 그 성분은 분명 경주권내의 철광산에서 생산된 철광산과 성분이 같아야 할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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