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프랑스어로 `명예(Noblesse)만큼 의무(Oblige)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노블레스(noblesse)`는 `귀족 신분`의 뜻이 있고, `오블리주(oblige)`는 `의무가 있는`, `어쩔 수 없는`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회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레스)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인, 관료, 재벌, 부유층 등은 과연 병역기피, 이중 국적 취득, 부정부패, 해외 재산도피 등의 문제에서 깨끗한지 의문스럽다.

어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년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는 영국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의 칼레 사람들은 시민군을 조직해 맞서 싸웠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식량이 고갈되어,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파격적인 항복 조건을 내걸었다.

"시민들 중 6명을 뽑아 와라.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해 처형하겠다." 칼레의 갑부인 `외수타슈 생피에르`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부유층 인사 6명이 자원했다. 이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에 자루 옷을 입고 영국 왕의 앞으로 나왔다. 사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임신 중이던 영국 왕의 아내가 처형을 만류했다. 이들을 죽이면 태아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왕은 고심 끝에 이들을 풀어 주었고, 6명의 시민은 칼레의 영웅이 되었다. 이 사건이 가진 자의 의무를 상징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탄생된 배경이다.

김유신 장군의 가문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김유신 장군의 부모는 이번 삽량문화축전에서 중요 인물로 내세운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이다. 조부는 김무력 장군으로 묘소는 통도사 뒤 영축산 자락에 있으며,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기반을 닦았다.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 장군은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 20만 명을 격파하여 삼국통일을 완수하였다. 금관가야의 후손 김무력, 김서현, 김유신. 김원술 4대가 결국 삼국을 통일했다고 할 수 있다.

반굴은 신라 장군 김흠순(또는 흠춘)의 아들로 삼국통일을 위해 신라가 백제를 정벌할 당시 출전하였다. 김흠순은 김유신 장군의 동생이다. 660년(무열왕 7) 신라는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탄현(炭峴)을 넘어 황산으로 진격하였다. 백제에서는 계백(階伯) 장군이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의 험한 곳을 택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의 결사대는 죽기를 각오하고 임했으며, 또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신라군에 대항하였으므로 처음 네 차례의 전투에서 신라는 고전을 면치 못했고 병사들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김흠순이 반굴에게 "신하가 되어 임금님께 충성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며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충효인 것이다."라는 말로 자극하였다. 반굴은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좌장군 `품일`도 신라군을 격분케 하기 위하여 어린 아들인 화랑 관창을 적진에 뛰어들도록 명령을 내렸다. 반굴과 관창이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자 신라군은 적개심에 불타올라 백제군을 총공격하여 마침내 대승을 거두었다.

원술은 김유신 장군의 둘째 아들로 672년 당이 말갈족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자 비장으로 출전하였으나, 당나라 장수 고간의 공격으로 효천, 의문 등이 전사하고 신라군은 패퇴하였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뛰어들려고 하였으나, 좌관 담릉 등이 말려서 후퇴하였다.

김유신은 김원술을 처형시킬 것을 왕에게 주청하였으나 문무왕은 김유신의 전공을 생각하여 처벌하지 않았다. 김원술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시골에 숨어 살다가 673년 7월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를 만나려 하였으나, 어머니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그 후  태백산에 들어갔는데, 675년 당나라의 군사가 매소성으로 쳐들어오자 지난날의 치욕을 씻기 위해 싸움터로 나가 공을 세웠다. 숨어살던 원술은 3만 명의 신라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당나라 장수인 이근행이 점거하고 있던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 남안의 매소성을 공격하여 당군을 패퇴시키고 승전하여 명예를 회복하면서 삼국통일에 기여하였다.

김영윤(金令胤)은 사량(沙梁) 사람이다. 급찬 반굴(盤屈)의 아들로 할아버지는 흠순이다. 각간으로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어진 마음이 깊고 신의가 두터워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 장성해서는 문무대왕이 발탁해 총재(?宰)로 삼았는데,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백성을 너그럽게 다스리니, 나라 사람들이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하였다.

신문왕 때 고구려의 잔당인 실복(悉伏)이 보덕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토벌할 것을 명령하고 영윤을 황금서당(黃衿誓幢)의 보기감(步騎監)으로 삼았다. 영윤이 떠날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번 길에서 우리 가문과 벗들에게 좋지 못한 소문이 들리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가서 보니 실복은 가잠성 남쪽 7리 까지 나와 진을 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이가 영윤에게 제안하였다.

"오늘의 이 흉악한 무리는 비유하자면 `제비가 장막 위에 둥지를 틀고 물고기가 솥 가운데서 노는 것`과 같아서 만 번 죽을 곳에서 나와 하루의 목숨을 위해 싸울 뿐입니다. 옛말에 `궁지에 몰린 도적을 쫓지 말라.`고 했으니 마땅히 사이를 두고 머물러 그들이 극도로 피로해지기를 기다려 친다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장군들은 그 말에 공감해 잠시 물러나는데 유독 영윤만이 수긍하지 않고, 전진이 있을 뿐 후퇴가 없다고 하며 적진에 달려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왕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그런 아버지(반굴)가 없었다면 이런 아들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의리와 장렬함이야말로 기릴 만하도다." 하고, 작위와 상을 추증하는 데 특히 후하게 하였다.

김유신 장군의 가문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투철하였다. 반굴은 김유신에게 가장 가까운 피붙이였다. 조카이자 사위를 희생시킴으로써 그는 패배감과 위기감에 젖은 신라군을 격발시켜 승전하였다. 김유신 장군은 사위를 희생케 함으로써 자기 딸인 영광을 일순간에 과부로 만들어버렸다. 후일 영광의 자식인 김영윤 또한 전장에서 장렬히 죽었다. 신라의 지도층과 귀족들은 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김유신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여전히 귀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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