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력 장군은 가야 구형왕의 왕자(손자라는 설도 있음)로 신라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자 신라에 귀순하여 진골 계급으로 편입되었다. 부인 박씨는 신라 법흥왕의 처제로 보도부인 박씨의 여동생이다. 뒤에 취한 두 번째 부인 아양궁주는 진흥왕과 사도왕후의 딸이었다. 564년 둘째 아들 김서현이 태어났는데, 그가 후일 김유신, 김흠순 형제 및 김보희, 김문희(문무왕의 생모)의 아버지가 된다. 김무력 장군은 579년 10월 16일에 향년 62세로 사망했다.

551년(진흥왕 12) 백제와 연합한 신라군은 거칠부의 지휘 하에 고구려의 남변을 공격하여 한강 상류에 해당하는 죽령 이북의 10개 군을 손에 넣었다.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되찾았던 한강 하류 지역마저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한강 유역 전체를 무력으로 장악하며 신라가 한반도 내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김무력 장군은 『삼국사기』에 나오는데, 첫 번째는 진흥왕 14년(553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신라본기」). 두 번째로 진흥왕 15년(554년)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신라본기」). 끝으로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열전」 김유신조).

550년경에 세워진 `단양적성비`는 영토를 넓힌 척경비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적성비에 나오는 인물 중 사서에 뚜렷하게 나오는 인물이 이사부, 비차부(比次夫), 무력(武力)이다. 적성비에는 `무력지 아간지(武力智阿干支)`라 기록되어 있다. 아간지란 신라의 17관등 중 6번째인 아찬(阿飡)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이다. 단양신라적성비 축조연대는 진흥왕 6~11년(545~550)으로 보고 있다.

관산성전투에서 보여준 김무력 장군의 활약은 기록을 보면 그에 걸맞게 인정받은 것을 알 수 있다. 561년에 세워진 `창녕진흥왕척경비`에는 `무력지 잡간(武力智?干)`으로 적어놓고 있는데, 잡간은 17관등 중 세 번째 등위에 해당한다. 대가야 마지막 왕으로 보이는 도설지(道設智)의 경우 그 등위가 `단양신라적성비`에서는 급간지로 9등위, `창녕진흥왕척경비`에서는 사척간으로 8등위임에 비하면 김무력의 승진이 얼마나 빠른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김무력의 등위는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에서도 그대로 잡간으로 나와 등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에는 `사돌부 출신인 무력지가 잡간`이라고 적었는데, 잡간은 신라 17관등 중에서 3등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김무력은 한강유역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장군으로 550년 무렵에는 5등급인 아간지였으나 창녕비의 내용으로 보아 561년 이후에는 잡간으로 승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진흥왕은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취하였는데, 신라는 동맹을 파기하고 한경 유역을 독점하고 신주를 설립하였다. 김무력 장군은 국방의 최전선인 신주 군주로 부임하여 국경을 안전하게 지켰다.

김무력 장군은 지금의 충북 옥천의 관산성이 함락되어 위기에 처하자 왕의 명령에 따라 급히 신주에서 옥천으로 전속력 행군하여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당시 전세는 백제군이 대가야, 왜의 원군을 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일종의 국제전이었다.

김무력 장군은 전략 전술에 뛰어난 장군으로 자신의 주력부대를 끌고 오면서 주변의 병력도 합류시켰다. 삼년산성의 병력인 비장 고간 도도가 바로 성왕을 참수한 주인공이다. 관산성은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가 지키다가 백제 왕자인 부여창에 의해 함락되어 후퇴한 상황이었다. 김무력 장군은 백제군이 포진한 배후인 금강 방면의 구릉지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김무력 장군이 성왕을 죽음으로 몬 것은 정보의 힘이었다. 성왕이 전쟁터에 친히 온다는 소식을 접한 신라군은 세작(細作), 즉 간첩을 보내 성왕이 지나갈 길을 탐지했고 군사를 매복시켰으며, 책임자인 도도로 하여금 복병을 이끌게 했다.

왕자인 부여창은 전투의 후유증으로 과로하여 감기 몸살에 걸렸다. 아버지인 성왕은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전선 시찰을 겸하여 아들인 부여창을 만나러 왔다. 호위병, 신하는 보병과 기병을 포함하여 겨우 50명이었다. 단출한 소부대를 이끌고 전선시찰에 나선 것이 천추의 한을 남겼다. 성왕은 안심하고 말을 달렸으나 신라군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접전 끝에 성왕의 호위병을 제압하고 성왕을 생포하였다.

성왕의 아들 사랑은 보통의 백성들과 다름없었다. 아들을 위로하고 전쟁 처리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오다가 매복에 걸린 것이다. 김무력 장군이 사전에 성왕의 이동 상황을 파악한 것은 미스터리이다. 하지만 김무력 장군의 조국이었던 김해의 금관가야는 가야 연맹체의 일원이었기에 대가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인맥을 맺어두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전쟁에서 적의 첩보를 파악하는 것은 최고 사령관의 우선적인 관심사이며, 그 첩보를 분석하고 활용하는 것은 장군의 전투능력과 직결된다. 최전방에서 백제 성왕을 생포했다는 부하의 보고를 받은 김무력 장군은 참수하여 머리는 본진으로 보내고, 몸은 백제군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 또한 현명한 판단으로 산채로 호송하다가 정보가 백제군으로 새어나가면 백제군이 전력을 다하여 구출하러 올 것이 예상되므로 상황에 맞는 올바른 판단을 한 것이다.

핵실험을 거듭하고 미사일을 연달아 발사하는 북한의 김정은에 대한 참수작전이 시도되고 있다. 미국의 특수부대가 수차례 작전 연습을 하였으며, 우리나라도 12월까지 공수특전단을 중심으로 참수부대를 창설하기로 하였다. 미군은 테러리스트 빈라덴을 처형한 사례처럼 은밀한 특수 수송기와 헬기를 운용한다. 우리나라도 시급히 도입해야만 한다.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김무력 장군을 필두로 아들 김서현 장군은 양주(양산)총관을 지냈고, 손자 김유신 장군은 삼국통일을 이룩하였으며, 증손자 김원술 장군과 김시득 장군은 당나라 군사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며 4대에 걸쳐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양산숲길보전회(010-4578-6278)에서 9월 24일 김무력 장군 묘소를 답사하는데, 관심 있는 양산신문 독자들도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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