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는 조선시대의 화원 집안인 외가로부터 천부적 재질을 물려받고,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인 강세황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왕실 화가가 된 뒤 정조의 초상화 제작에 참여하고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봉직했다. 단원의 풍속화는 백성들의 생활 모습을 익살스럽고 해학적으로 그렸다.
통도사를 방문하여 선자바위에 이름을 남겼다.

통도사를 방문한 김홍도와 그의 스승 김응환이 선자바위에 이름을 남김
조선시대의 최고의 천재적 화가였던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통도사전도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의 대웅보전 삼세 후불탱화가 김홍도의 지휘로 완성
용주사 부모은중경 목판의 변상도 그림 제작에도 참여

○ 단원은 도화서 화원으로 정조
임금의 초상화 제작

조선시대의 화가로서 본관은 김해(金海)이다굨 자는 사능(士能)이고 호는 단원(檀園)굚 단구(丹邱), 서호(西湖)굚 고면거사(高眠居士), 첩취옹(輒醉翁)등이다굨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손자인 석무(錫武)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원 집안인 외가로부터 천부적 재질을 물려받았다.

어려서는 경기도 안산에 거주하던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이며 이론가인 강세황(姜世晃)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畵署 畵員)이 된 뒤 1771년(영조47)에 왕세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고, 1781년(정조5)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 도사(圖寫)의 동참 화사로 활약하고 그 공으로 경상도 안동 부근 안기(安奇)역의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도화서 화원으로서는 최고 영예인 `어용화사`가 된 불세출의 천재화가이다.
이 무렵부터 명(明)의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했다굨 1791년에 다시 어용화사로 선발되어 정조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그해 겨울 충청북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 정월까지 봉직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는 안견(安堅)굚 정선(鄭敾), 장승업(張承業)과 함께 조선시대의 4대 화가로 손꼽힌다. 단원의 풍속화는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양반들의 풍류와 일탈 등의 모습을 익살스럽고 해학적으로 그려 당시 사회를 풍자한 작품들이다.

단원 풍속도첩(檀園 風俗圖帖)에는 글방, 밭갈이, 활쏘기, 씨름, 행상, 무동, 기와이기, 대장간, 나들이, 시주, 나루터, 주막, 고누놀이, 빨래터, 우물가, 담배썰기, 자리짜기, 벼타작, 그림감상, 길쌈, 말징박기, 고기잡이, 신행길, 점심, 장터길 등 당시 풍속에 대한 다양한 관심과 예리한 관찰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실려 있다.

○ 통도사 선자바위에 새겨진 김홍
도와 김응환의 이름

통도사 선자바위에 김홍도(金弘道)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굨 이 이름이 단원 김홍도인 것을 입증하는 이유는 그 옆에 나란히 새겨진 스승 김응환(金應煥)의 이름 때문이다. 김응환은 김홍도 보다 세 살 연상으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부채를 편 것 같은 형태라 선자바위란 별칭을 얻은 이 바위 위에 사방으로 빽빽하게 새겨진 이름들 사이에서 단원 김홍도와 복헌 김응환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선자바위에 새긴 글씨는 단원의 자필이 아니고굚 당시 돈을 받고 이름을 새겨주던 석공의 솜씨라고 한다.

김홍도의 이름은 비교적 선명하나 김응환의 이름은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김홍도와 김응환이 1788년 정조의 어명에 따라 금강산과 동해안 일대를 그림으로 그리고, 다시 1789년에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대마도로 가면서 통도사에 들러 남긴 기록으로 추정된다.

스승 김응환(金應煥)이 왕명을 받고 몰래 일본의 지도를 그릴 임무를 띠고 떠날 때 그를 수행, 부산까지 갔으나 김응환이 거기서 병으로 죽자 홀로 대마도(對馬島)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模寫)해 가지고 돌아왔다.

양산 통도사와 관련한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그림이 있다.통도사 성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통도사전도`가 그것이다굨 조선 후기 통도사의 전경을 실경으로 그린 이 그림에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 속에 안긴 통도사의 옛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낙관이 없고, 그림에 관한 기록도 없어 단원의 그림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 통도사 성보박물관을 방문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양산시립박물관을 방문하면 모사품을 구경할 수 있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굨 명심할 것은 박물관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 후레시를 터뜨리면 안 된다.

○ 용주사는 정조의 효심과 단원의
그림이 조화된 곳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용주사는 1790년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에 대한 지극한 효심으로 세운 원찰이다. 정조가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억울하게 죽은 부친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화산으로 옮긴 후 갈양사 자리에 부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웠다.

용주사 전각 구조와 배치는 왕실의 전범을 따른 특징을 갖게 되었으며 홍살문도 건립하였다. 정조가 용주사가 완공되기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개혁 군주 정조는 즉위 초 왕실의 원당 사찰 건립을 금지하고굚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등 억불정책을 폈다.그런 그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기면서 불심을 내기 시작해 이듬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능침 원찰 용주사를 140칸 규모로 지었다.

정조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으로 꼽히는 게 `불설대보 부모은중경`이다굨 승려 보경에게서 받아 읽고는 크게 감동받아 자신의 명령까지 어겨가며 능사를 건립했다고 한다. 한문, 언문, 그림으로 제작한 부모은중경 목판본을 시주해 백성의 효심을 일깨우는 거울로 삼도록 했다.

정조의 명을 받아 용주사 건립을 주관한 사람은 수원부사 조심태이다. 1789년 현륭원 조성당시 새로운 수원부 읍치의 건설을 책임졌던 조심태는 수원부 읍치의 2단계 공사와 동시에 용주사 건설의 책임을 떠맡았던 것이다.

이 때 용주사에는 많은 국가적 문화재가 만들어졌다.1790년 10월 6일 조심태가 올린 용주사 준공 보고에 따르면, 대웅보전의 후불탱화는 김홍도가 주관하고, 김득신, 이명기가 함께 참여하였고, 기타 화탱은 상겸(尙謙)이 변수를 맡아 주관하고 민관(旻寬)이 화원변수로 참여하였다.

김홍도와 이명기가 1789년 8월 14일 동지정사 이성원(李性源)의 추천으로 사신(使臣)단의 일원이 되어 청나라 북경에 갔다가 용주사 창건이 시작된 1790년 2월 북경을 출발하여 도착하자마자 용주사 후불탱화를 주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김홍도와 이명기는 북경에서 천주교회당에 가서 서양의 성화(聖畵)를 살펴본 뒤 곧바로 후불탱화 작업에 임하였던 것이다.그래서 용주사 후불탱에서는 전통적인 불화의 공간 구성방식을 따르면서도 인물의 표현에 있어서 음영법을 써서 입체감을 주는 서양화법이 사용되었다.

용주사의 효행박물관에는 정조가 용주사를 건립하면서 하사한 상량문과 『불설부모은중경』 목판 42매와 김홍도가 그린 변상도, 정조가 직접 지은 게송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 김홍도가 그린 사곡병풍, 금동향로 등 유물이 있어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느낄 수 있다.효행박물관의 자원봉사자들이 사진을 못 찍게 했지만 설득하여 중요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경기 화성시 용주사 대웅보전

화성시 용주사 대웅보전 삼세후불탱화

양산시립박물관 김홍도 작 통도사전도

통도사 하마비

통도사 선자바위 김홍도 이름

용주사효행박물관 대웅보전 삼세후불탱화

김홍도 김응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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